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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헤이그, 평화를 품은 도시의 역사

by 여행한줌 2025. 6. 8.

네덜란드 서부 해안의 조용한 도시, 헤이그(The Hague).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이 도시를 지도에서 처음 본 순간,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수도도 아니고 유럽의 대표 관광지도 아닌 이곳이, 어째서 국제사회의 중심이라 불리는 걸까?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기차에서 내려 도시를 걷다 보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이 하나씩 눈앞에 펼쳐집니다. 귀족의 사냥터로 시작해 세계 정의의 현장이 되기까지, 헤이그는 소리 없는 힘으로 세상을 바꾸어온 도시였습니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평화'라는 개념을 실체로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 건축물 사진

귀족의 사냥터에서 세계 정치의 중심으로

헤이그는 처음부터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곳은 아닙니다. 13세기 플로리스 4세 백작이 이곳에 사냥용 별장을 지으며 ‘헤르토헌 하허(Hertoghen Hage)’라는 이름을 얻었고, 귀족들의 전용 휴양지로 알려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조용한 마을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네덜란드 정치의 중심지로 서서히 변모하게 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 시대가 시작되자, 암스테르담은 상업과 예술의 도시로 성장했고, 헤이그는 정부와 의회, 왕실이 위치한 정치 중심지로 자리 잡습니다. 국가의 행정기관 대부분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수도는 아니지만 국가의 방향을 결정짓는 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죠. 헤이그가 국제사회에서 주목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899년과 1907년에 개최된 ‘헤이그 평화 회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네덜란드 여왕 빌헬미나가 제안한 이 회의는 국제 분쟁을 무력 없이 해결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로, 도시의 중립성과 평온한 환경 덕분에 개최지가 된 것입니다. 이로써 헤이그는 평화와 국제법의 도시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평화를 실현하는 도시의 구조

이후 헤이그에는 국제사법재판소(ICJ), 국제형사재판소(ICC), 유럽형사경찰기구(유로폴),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등 다수의 국제기구들이 본부를 두게 되었습니다. 특히 ICJ는 유엔의 주요 사법기관으로,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하며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ICC는 전범 재판을 통해 인도주의적 가치 수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처럼 헤이그는 단순한 법적 기능 이상의 상징성을 가집니다. 미국 철강 재벌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로 지어진 ‘평화궁(Peace Palace)’은 그 중심이 되는 건축물로, 외관은 고풍스럽지만 그 안에서는 국제법 교육과 재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리 곳곳을 걷다 보면 국제기구의 깃발이 펄럭이고, 비네 호프(Binnenhof)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트램과 자전거가 유유히 지나갑니다. 조용한 도시임에도 역동적인 정치와 세계적 논의가 실시간으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처럼 법과 평화라는 개념이 일상 속에 녹아든 구조는, 여행자에게 독특한 긴장감과 품격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영화와 책으로 다시 만나는 헤이그

헤이그는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등장할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The Trial of Ratko Mladić에서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벌어지는 심문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며, 그 속도감과 진중함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문학 분야에서는 국제변호사 필립 샌즈의 저서 East West Street이 자주 인용됩니다. 이 책은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와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국제법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개념들이 실제로 적용되는 법정이 바로 헤이그임을 강조합니다.
여행자로서 헤이그를 걷는다는 것은, 정의와 윤리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지를 직접 목격하는 경험입니다. 단순히 정해진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만 존재했던 가치들이 도시의 풍경과 일상 속에 녹아든 모습을 만나는 시간이 되는 것이죠.

조용한 골목에서 세계를 만나다

해질 무렵, 평화궁 앞 벤치에 앉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그 순간, 헤이그는 조용히 말을 건넸습니다. 이 도시는 전쟁을 겪은 도시가 아니라, 스스로 평화를 선택한 도시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고, 웅변하지 않지만 울림이 있는 도시. 회의장과 법정에서 울리는 목소리, 시위자의 손끝에 들린 한 송이 꽃, 그리고 그것을 지나치는 여행자의 발걸음.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 그것이 바로 헤이그입니다. ‘의미 있는 여행지’란 무엇일까요. 사진만 남기는 여행이 아닌, 마음에 무게를 남기는 여행. 헤이그는 그런 여행지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상징하는 이 도시는, 그 조용한 골목에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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